섣달 그믐날
뒤숭숭하게 밤 지새우며 앉아 있다가
멍하게 졸린 눈으로 아침 맞았네.
제멋대로 육신은 늙고 병들고
세월은 겨울에서 봄으로 흘러가누나.
도부 붙여 축원할 일 뭐가 있겠나.
새로 담근 잣잎술도 탐내지 말자.
오로지 바라나니 가슴에 담긴
본연의 참모습을 빨리 깨달아야지.
택당 이식(1584~1647)이 쉰한 살을 앞둔 1633년 섣달 그믐날의
심경을 썼다. 풍속에 따라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우고 있다.
한 해를 보내려니 뒤숭숭하고, 밤을 새우려니 멍하기만 하다.
나이 오십줄에 들고 보니 몸은 병들고, 계절은 바뀌어 벌써 겨울이다.
또 바로 봄이 될 것이다.
그 모든 변화가 내 의지나 소망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다.
새해가 되면 도부(새해에 악귀를 쫓는 부적)도 붙이고 잣잎술도 마시면서
운수가 잘 풀리기를 기원한다. 세상 풍습이니 남들처럼 나도 그렇게 한다.
하지만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일까?
정작 필요한 것은 외형이나 물질이 아니라 사방 한 치의 가슴이다.
올해는 마음이 본래 가진 진정성을 인정하고
양심이나 상식에 따라 살기를 바란다.
더 배울 것도 얻으려 애쓸 것도 없다.
누구나의 마음속에 이미 다 가진 것을 확인만 하면 된다.
안대회 성균관대 교수. 한문학
2016년 12월 31일자 조선일보 <가슴으로 읽는 한시>에 실린 글을
그대로 옮겨 적어 보았다.
새해 아침 새벽에 깨어서 나도 멍하게 앉아 있다가
뒤적거린 섣달 그믐날 신문에서 좋은 한시와 글을 읽고
새해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본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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